
김정현 기자
대한민국 언론인상 수상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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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가 지난 2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차 임시전국당원대회에서 대표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더불어민주당 8·2 전당대회는 사실 전임 대표인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으로 공석이 된 1년짜리 당대표 자리를 채우는 임시 전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약식이라고 치부하기엔 이번 전대가 민주당에 남긴 메시지는 매우 강렬했다. ①당원들은 스스로가 당의 주인임을 재차 증명했고 ②친여 성향 방송인 김어준씨를 위시한 대형 유튜브 채널은 당심을 견인하며 존재감을 확인했다. 반면 ③국회의원들의 영향력은 영 맥을 못 췄다. '누가 민주당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여의도 기득권을 갈아엎는 '뉴노멀' 정치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평가다.
①당 기반 없는 鄭… 111만 권리당원 공략
강력한 개혁 당대표를 표방하며 당권을 거머쥔 정청래 대표의 승리는 곧 권리당원의 승리였다. 이른바 국회의원들의 '오더'가 먹히는 대의원들은 경쟁자인 박찬대 의원을 더 지지했지만, 권리당원들은 결국 정 의원을 당대표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대의원 1표는 권리당원 17표에 해당할 만큼 가중치가 높아 막판 변수로 꼽혔다. 하지만 111만 명이라는 압도적 숫자로 밀어붙이는 권리당원들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정 대표는 당선 직후 "정청래가 당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서울 마포을에 출마하는 손혜원(가운데) 더불어민주당 홍보위원장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이 열린 2016년 3월 24일 문재인(왼쪽) 전 대표, 정청래 의원이 손 후보와 함께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원들이 정 대표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처럼 발군의 행정·정책능력을 증명한 인물이 아니다. 당내 조직 기반도 약하다. 대신 정 대표는 "당심을 읽는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페이스북 소통은 기본이고, 김어준씨가 운영하는 딴지일보 게시판에 2016년부터 게시글 1,000여 건을 작성했을 정도로 당원과의 소통에 올인했다. 과거 컷오프를 당했을 때는 "내 사전에 이혼과 탈당은 없다"며 선당후사를 몸소 증명하기도 했다. 당 관계자는 "당권을 얻으려면 철저히 당심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을 정 대표가 20년간 입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 대표는 앞으로 '정청래 모델'을 민주당에 이식시킬 계획이다. 취임 후 열린 첫 최고위원 회의에선 곧장 당원주권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장은 전대기간 정 대표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최측근 장경태 의원이 맡았다. 특위는 전 당원 1인 1표제, 전 당원 투표 상설화, 당원교육 활성화, 전 당원 콘서트 등 정 대표의 주요 공약을 추진할 계획이다. 전 당원 1인 1표제는 사실상 대의원의 권리를 무력화하는 조치로, 명실상부 권리당원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다. 이를 두고 정 대표가 차기 당대표 연임 작업 준비에 벌써부터 착수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한 중진 의원은 "민심과 당심은 언제든 갈라질 수 있다"며 "민심을 버리고 당심만 좇으면 그건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②명심보다 어심? 전대판 흔든 김어준
친여권 성향 유튜브 채널들도 전대 판세에 입김을 행사하며 존재감을 톡톡히 입증했다. 특히 정 대표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던 김어준의 뉴스공장, 이동형TV 등 대형 유튜브 채널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뉴스공장은 구독자가 222만 명, 이동형TV는 83만 명에 달한다. 김씨와 이동형 작가는 지난해 불법 계엄 당일 이 대통령으로부터 '긴급 라이브 방송'을 부탁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을 만큼 여권의 대표적 스피커로 꼽힌다. 반면 박 의원은 중소형 유튜브 채널에서 주로 지지를 받았는데, 대형 유튜버의 물량공세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청래(왼쪽)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5일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했다. 유튜브 캡처
이들 대형 유튜브는 결정적 국면마다 정 대표를 간접적으로 챙기며 전대에 개입했다. 전대 초반 일부 당원들 사이에서 정 대표에 대한 비토 여론이 확산됐을 때 엄호에 나선 것도 이들이었다. 정 대표가 과거 이 대통령을 비판했던 발언들이 소환되며 부정적 여론이 피어오르자, 이 작가는 "만일 박찬대 캠프에서 이런 전략을 썼다면 진짜 바보 같은 전략"이라며 "누가 돼도 상관없는 싸움"이라고 밝혔다. 명시적으로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지만, 박 의원 캠프에 견제구를 날리며 사실상 정 대표를 두둔하는 모양새였다. 결과적으로 이 작가의 주장이 당원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었고, 판세는 오히려 정 대표의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강선우 사태'도 결정타였다. '갑질 논란'으로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서 물러난 강 의원을 두고 두 사람은 정반대로 갈라졌는데, 정 대표는 "동지는 비 올 때 함께 비 맞아 주는 것"이라며 감쌌고, 박 의원은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이에 김 씨는 강 의원 사퇴 다음 날인 지난달 24일 "언론이 강선우가 아닌 이재명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며 "(당이) 전반적으로 대응을 매우 잘못했다. 이러면 지지자들이 같이 상처를 입는다"고 말했다. 박 의원의 자진사퇴 촉구가 '내부총질'이라고 직격한 것이다.
김씨는 지난 4일에는 또 "강선우 후보 사퇴 요구가 박찬대 캠프의 결정적 패착"이라며 "권리당원들은 사퇴 요구를 '대통령을 위해서'라고 읽어주지 않고 '동지를 내가 더 친명임을 입증할 소재로 썼다'고 본 것"이라고까지 평가하며 박 의원을 몰아세웠다. 김씨가 전대 판을 쥐고 흔들면서, 정치권에선 "이번 선거의 최종 승자는 '명심'(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이 아니라 '어심'(김어준의 의중)이었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8·2전당대회 기간 박찬대 의원을 지지했던 김용민 의원의 게시글이 딴지일보 유배지에 보내졌다. 딴지일보 게시판은 지난 전대 기간 정청래 대표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다. 딴지일보 캡처
③체면 구긴 의원들, 당원들 '유배지' 심판
반면 의원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됐다. 정 대표는 전대 기간 내내 경쟁자인 박 의원에 비해 의원 지지에서 열세를 보였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이른바 '이재명의 사람들'로 불렸던 다수의 친이재명(친명)계 의원들이 박 의원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쏠림 현상에 중립 성향 의원들은 상황을 관망하며 박 의원의 승리를 점쳤다. 정 대표와 가까운 친명 의원들도 "정청래가 안타깝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뚜껑을 열어보니, 단단히 체면을 구긴 쪽은 의원들이었다. 권리당원의 압도적 '픽'은 정 대표였고, 심지어 압승을 자신했던 대의원 표심도 정 대표가 의외로 선방하며 박 의원과 박 의원을 돕는 친명 의원들의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민주당 관계자는 "대의원 영향력이 권리당원으로 퍼질 것이라는 박찬대 쪽 전략이 완전 패착이었다"며 "결과만 보면, 권리당원의 압도적 기세에 대의원들이 굴복한 모양새다. 더 이상 의원들의 말발이 안 통한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당원들이 의원들 '심판'에 나서는 등 위세를 떨치는 모습이다. 딴지일보에선 김용민 의원이 박 의원을 지지하는 '계파정치'를 했다는 이유로 김 의원의 게시글이 유배지(비추천이 많은 경우 이동되는 게시판)로 이동되는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당원들은 박 의원을 지지한 의원들의 유튜브 채널을 찾아다니며 구독을 취소하는 운동까지 벌였다. 한 의원은 "지난 전대에선 이재명을 쫓는다고 계파정치라 비판받지 않았는데, 박찬대를 지지하면 왜 계파정치가 되느냐"고 토로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본 다른 의원은 "원래 의원들은 안장 없이 말 위에 올라탄 기수와 같은 신세"라고 촌평했다.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